서랍을 열어 필통을 뒤집어 보면 안 나오는 펜이 서너 자루씩 나옵니다. 잉크는 아직 남았는데 종이에 대면 흰 자국만 그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안 나오는 이유가 다 같지는 않습니다. 볼펜은 촉 끝의 아주 작은 볼이 말라 붙어 멈추고, 마커는 뚜껑 틈으로 용제가 날아가 색소만 남아 흐려집니다. 같은 필통에 함께 있었어도 무너지는 경로가 다릅니다.
볼펜과 마커는 멈추는 자리가 다릅니다
볼펜의 촉 끝에는 아주 작은 금속 볼이 홈에 물려 있습니다. 종이 위를 구르면서 뒤쪽 잉크를 조금씩 끌어와 묻히는 구조라, 이 볼이 자유롭게 돌아야 선이 나옵니다. 오래 쓰지 않으면 볼 둘레에 붙어 있던 잉크가 마르면서 볼과 홈을 붙여 버리고,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눌러도 잉크가 딸려 나오지 않습니다.
수성이나 중성펜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잉크가 묽어서 촉까지 오는 통로가 가느다란 모세관에 가깝고, 그래서 중력의 도움을 더 받습니다. 이런 펜을 촉이 위로 가게 오래 세워 두면 잉크가 뒤로 물러나 촉과 잉크 사이에 빈 구간이 생기고, 그 구간은 다시 흔들어도 잘 메워지지 않습니다.
마커와 형광펜은 아예 다른 경로로 무너집니다. 안쪽에 잉크를 머금은 심지가 들어 있고 그 심지가 촉으로 잉크를 내보내는 구조인데, 이 잉크는 색소를 용제에 녹여 만든 것입니다. 뚜껑이 헐겁거나 아예 열려 있으면 용제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남은 색소가 촉 끝에서 굳으며 선이 흐려집니다.
여기서 갈라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잉크가 줄어서 안 나오는 것과 통로가 막혀서 안 나오는 것은 대응이 반대입니다. 잉크가 남았는데 안 나온다면 통로 문제이므로 흔들거나 문질러 볼 여지가 있고, 잉크 자체가 바닥났다면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펜대를 밝은 빛에 비춰 잉크 기둥이 어디까지 남았는지 먼저 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연필은 이 셋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르는 잉크가 없어 몇 년을 두어도 그대로인 대신, 떨어뜨리면 안쪽 심이 여러 도막으로 끊어져 깎을 때마다 부러집니다. 겉은 멀쩡한데 유독 잘 부러지는 연필이 있다면 그 이유입니다.
눕혀 둘까요, 세워 둘까요?
유성 볼펜은 눕혀 두는 편이 낫습니다. 잉크가 되직해 중력에 크게 기대지 않고, 촉을 위로 세워 두면 잉크가 뒤로 내려가 촉과 잉크 사이가 벌어집니다. 반대로 촉을 아래로 계속 세워 두면 무게 때문에 촉 끝으로 잉크가 몰려 새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눕히는 쪽이 두 문제를 다 피합니다.
수성펜과 중성펜은 촉이 아래를 향하게 두는 편이 잘 나옵니다. 묽은 잉크가 모세관을 타고 촉까지 내려와 있어야 첫 획부터 진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필통에 세로로 꽂아 두는 흔한 방식이 이 계열에는 맞는 셈인데, 다만 촉이 바닥에 닿아 눌리지 않는 통을 골라야 합니다.
마커는 눕히는 쪽이 무난한데, 안쪽 심지가 잉크를 머금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두든 공급 자체는 되지만, 한쪽으로 오래 세워 두면 그쪽에 잉크가 몰려 반대쪽이 먼저 마릅니다. 양쪽 굵기가 다른 마커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만년필은 아예 다른 계열이라, 오래 쓰지 않을 것이라면 잉크를 비우고 세척한 뒤 보관하는 것이 기본이고, 잉크를 넣은 채로 둘 때는 촉이 위를 향하지 않게 합니다. 촉이 위로 향한 채 오래 있으면 잉크가 뒤로 물러나 첫 획이 나오지 않고, 그 상태에서 억지로 쓰면 촉 끝이 마른 잉크에 긁힙니다.
정리하면 두는 방향은 취향이 아니라 잉크의 되기와 공급 방식에서 나옵니다. 한 필통에 종류를 섞어 담고 있다면 그 통이 어느 계열에 맞는지부터 보는 편이 낫습니다.
다만 몇 달씩 손대지 않을 것이 아니라면 방향에 지나치게 매달릴 일은 아닙니다. 매일 쓰는 펜은 쓰는 동안 잉크가 계속 움직여 어느 방향으로 두든 문제가 잘 생기지 않고, 방향이 결과를 가르는 것은 오래 두는 쪽입니다.
굳은 펜에서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요?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촉 끝이 살짝 마른 정도까지로, 볼펜이라면 종이 위에 힘을 빼고 원을 그리듯 여러 번 문지릅니다. 볼이 구르면서 마른 잉크를 밀어내는 과정이라, 세게 누르는 것보다 천천히 여러 번 굴리는 쪽이 효과가 있습니다. 종이 대신 손등에 그으면 기름 때문에 더 안 나오므로 종이를 씁니다.
그래도 안 나오면 촉을 잠깐 데우는 방법이 있는데, 따뜻한 물에 적신 천에 촉 끝만 몇 초 대었다가 다시 그어 보는 정도인데, 마른 잉크가 물러지면서 볼이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뜨거운 물에 담그거나 불에 대는 것은 권하기 어렵습니다. 펜대가 변형되거나 잉크가 팽창해 새어 나옵니다.
되돌리기 어려운 쪽은 셋입니다. 첫째, 볼이 홈에 완전히 고착돼 아예 구르지 않는 상태입니다. 종이에 대고 굴려도 볼이 도는 느낌이 없으면 이 경우입니다. 둘째, 잉크 기둥 중간에 빈 구간이 생긴 상태로, 이건 촉이 아니라 관 안쪽 문제라 촉을 아무리 다뤄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셋째, 떨어뜨려 촉이 눌린 상태인데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선이 한쪽으로 긁힙니다.
마커는 판정이 조금 더 쉬운 편으로, 촉을 눌렀을 때 잉크가 배어 나오면 아직 쓸 수 있고, 눌러도 마른 느낌만 나면 용제가 날아간 것입니다. 후자는 되살릴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리필용 잉크가 나오는 제품이라면 그쪽이 유일한 길입니다.
한 가지 더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은 펜을 되살리려다 잉크가 새어 나와 다른 물건을 버리는 경우입니다. 따뜻한 물에 대는 방법을 쓸 때는 종이 위에서 하고, 되살아난 펜을 바로 필통에 넣기 전에 촉 주변에 맺힌 잉크를 닦아 냅니다. 그 한 방울이 필통 안쪽과 다른 펜의 몸통에 옮겨 붙으면 지우기 어렵습니다.
플라스틱 필통이나 통에 잉크가 묻어 자국이 남았다면, 표면에 스며든 색소는 플라스틱 용기 착색에서 다룬 것과 같은 성격입니다.
되살릴지 버릴지를 정하는 기준도 세워 두면 편합니다. 위의 방법을 두 번 해 보고 달라지지 않으면 거기서 끊는 것이 실질적인데, 세 번째부터는 성공률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그동안 촉을 눌러 대다 오히려 망가뜨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값이 나가는 펜이라면 심만 갈아 끼우는 쪽이 남아 있는지부터 봅니다.
리필심으로 갈 때는 규격을 먼저 확인합니다. 겉보기에 굵기가 비슷해도 길이나 끝의 걸림 모양이 다르면 뚜껑이 안 닫히거나 눌러도 촉이 나오지 않고, 그 상태로 억지로 끼우면 몸통 안쪽 걸쇠가 상합니다. 쓰던 심을 빼서 나란히 놓고 길이와 끝 모양을 견줘 보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잘 나오던 펜이 갑자기 멈췄을 때는 종이 쪽을 의심할 자리도 있습니다. 코팅된 종이나 기름이 밴 면에서는 볼이 잉크를 놓지 못해 선이 끊기는데, 다른 종이에 그어 보면 몇 초 만에 갈립니다.
손의 각도도 생각보다 관여합니다. 볼펜은 볼이 종이에 눌린 채 굴러야 잉크를 놓는 구조라, 펜을 지나치게 눕혀 쥐면 볼에 걸리는 힘이 줄어 선이 끊기듯 나옵니다. 안 나온다고 판단하기 전에 조금 세워 쥐고 다시 그어 보면 펜 자체는 멀쩡한 경우가 있습니다.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습니다. 남은 잉크를 눈으로 확인하고, 종이와 쥐는 각도를 바꿔 보고, 그다음에 문지르거나 데우는 방법으로 넘어갑니다. 앞의 두 가지는 몇 초면 끝나는데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순서를 지키면 손댈 일 자체가 줄어듭니다. 문지르거나 데우는 쪽은 펜에 부담이 가는 방법이라 뒤에 두는 것이 맞습니다.
필통과 서랍에서 자주 어긋나는 자리
흔히 반대로 하는 다섯 가지
- 모든 펜을 한 통에 세워 담는다 — 계열마다 맞는 방향이 달라 일부가 먼저 마릅니다.
- 뚜껑을 헐겁게 얹어만 둔다 — 마커는 그 틈으로 용제가 날아갑니다.
- 안 나오는 펜을 그대로 필통에 남긴다 — 자리만 차지하고 매번 다시 시험하게 됩니다.
- 창가나 난방기 근처에 둔다 — 열이 용제 증발과 잉크 팽창을 함께 앞당깁니다.
- 펜과 종이를 같은 칸에 붙여 둔다 — 새어 나온 잉크가 종이로 옮겨 갑니다.
첫 번째가 가장 흔한데, 필통 하나에 유성 볼펜과 수성펜과 마커를 함께 세워 담으면 어느 한 계열은 반드시 불리한 방향으로 서 있게 됩니다. 통을 나누기 어렵다면 자주 쓰는 것만 세우고 나머지는 얕은 트레이에 눕혀 두는 정도로도 달라집니다.
뚜껑은 소리로 확인하는 것이 빠른데, 딸깍 소리가 나야 제대로 닫힌 제품이 많고, 그 소리 없이 얹혀만 있으면 틈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뚜껑 안쪽에 잉크가 말라붙어 딱딱한 테가 생겼다면 그것 때문에 끝까지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그 테를 손톱으로 걷어 내면 다시 닫힙니다.
안 나오는 펜을 남겨 두는 것도 생각보다 손해입니다. 급할 때마다 그 펜을 집어 몇 번 그어 보고 다시 넣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되살리기를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 자리에서 정리하는 편이 다음번 시간을 줄입니다.
두는 자리는 온도와 빛을 함께 봅니다. 창가에 둔 형광펜이 유난히 빨리 흐려지는 것은 색소가 빛에 약하기 때문이고, 난방기 근처는 용제 증발을 앞당깁니다. 서랍 안이 안전한 이유가 어둡고 온도가 덜 오르내리기 때문인데, 이 조건은 책과 종이의 습기에서 본 것과 같은 계열입니다.
펜과 종이를 같은 칸에 붙여 두는 것도 다시 볼 자리입니다. 새어 나온 잉크는 플라스틱보다 종이로 훨씬 잘 옮겨 가고, 종이에 밴 잉크는 지울 방법이 없습니다. 칸을 나누기 어렵다면 펜을 지퍼백에 담아 두는 정도로도 그 경로가 끊깁니다.
오래 두려면 무엇을 확인하나요?
한동안 쓰지 않을 필기구는 넣기 전에 세 가지만 보면 되는데, 뚜껑이 끝까지 닫혔는지, 촉 주변에 잉크가 맺혀 있지 않은지, 잉크가 얼마나 남았는지입니다. 세 번째를 보는 이유는 거의 다 쓴 펜을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자식이 섞여 있다면 따로 다뤄야 하는데, 전자펜이나 스타일러스에 배터리가 들어 있다면 오래 넣어 둔 배터리가 새어 접점을 부식시킬 수 있어, 그 부분은 배터리 누액 쪽 기준을 따릅니다. 필기구와 같은 통에 담아 두면 새어 나온 액이 다른 펜까지 상하게 합니다.
여러 자루를 한꺼번에 두는 상자라면 눕히는 쪽으로 통일하는 편이 관리가 쉽습니다. 방향이 섞이면 어느 것이 불리한 자세로 있었는지 나중에 알 수 없고, 눕혀 두면 적어도 잉크가 한쪽으로 몰리는 일은 줄어듭니다. 대신 굴러다니지 않게 칸을 나눠 두면 촉끼리 부딪히는 것도 막습니다.
꺼낼 때는 곧장 종이에 그어 보기 전에 촉을 한 번 봅니다. 마른 잉크가 테를 이루고 있으면 그것부터 마른 휴지로 닦아 내고 긋는 편이 낫습니다. 그 테를 그대로 종이에 대면 첫 획에 덩어리가 묻어 종이를 버리게 됩니다.
몇 자루가 같은 방식으로 굳어 있다면 펜 문제가 아니라 둔 자리의 문제로 봅니다. 같은 상자 안에서 한두 자루만 굳었다면 그 펜의 뚜껑을 의심하고, 여러 자루가 함께 굳었다면 그 자리의 온도나 빛을 바꿀 근거가 됩니다. 한 자루씩 원인을 찾는 것보다 이 구분 하나가 손댈 자리를 훨씬 빨리 좁혀 줍니다.